- 디자인역사
- 원시시대에는 주거지를 꾸미거나 몸을 치장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라기 보다는 예측불허인 자연의 힘을 통제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출발했다.원시인들은 생존을 위해 도구를 만들고 비바람과 햇볕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움집을 만들기도 했으며, 당시 초자연적이고 마술적인 힘으로 보호하기 위한 주술적인 방법으로 인간들은 사람과 짐승의 형상으로 벽화나 조각을 만들었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초를 세운 최초의 사람은 수메르인으로 기원전 3500년경부터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합류하는 지역에 수많은 도시를 건설하고 인류 최초로 문자를 사용하였으며 공통의 종교, 수학, 법률 그리고 건축법을 발달시켰다. 수메르인들은 왕이 죽으면 저승에서도 사람들을 거느릴수 있도록 모든 가족과 노예들은 물론 왕궁에서 사용했던 물건들을 함께 묻었기 때문에 부장품을 통해서 그들의 찬란했던 문명을 추측해 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흙으로 빚어 햇볕에 말린 벽돌을 사용하여 신전을 중심으로 한 정교한 도시를 만들었다. 이 건물 내부에는 신전뿐만 아니라 상점, 일터, 거주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방어 및 공공 사업같은 작업과 노동의 분업을 통해 도시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설형 문자를 개발하여 계약이나 규칙, 공고 그리고 통계나 법률 등을 기록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함무라비 법전이다.
영혼불멸에 대한 그들의 맹목적인 관심사는 살아있는 신으로 간주되었던 그들 지배자의 사후 안락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었다.거대한 이집트의 건축물과 예술품들은 파라오의 영혼의영원한 영광을 위해 존재하였다. 이집트 인들은 그 밖에도 문학, 의학, 고등 수학을 발달시켜 인류문명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영혼불멸을 믿은 이들은 지상에서의 행복을 죽은 후에도 누릴 수 있도록 무덤에 온갖 사치품들을 함께 묻었다. 따라서 무덤의 벽면에 그려진 벽화와 상형 문자들도 죽은 자의 생전의 일상 생활을 세세히 묘사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이집트문명 중 피라미드 건축과 스핑크스는 불멸의 오리엔트문화로서 거대문명발전의 초시를 이루었다. 초상화와 조각상의 인체는 엄격한 공식에 따라 묘사되었다. 눈과 어깨는 정면을 향하고있고, 머리와 팔, 다리들은 측면으로 그려졌다. 또한 벽화의 표면은 수평의 선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마르고 어깨가 넓으며 엉덩이가 작은 인물들이 머리 장식을 하고 치마 모양의 옷을 입은 채 한쪽 다리를 내밀고 있다. 인물의 크기는 신분에 따라 달라지는데 파라오는 거인처럼 묘사되어 있는 반면, 시종들은 난장이 같이 그리고 있다.
그리스 문명은 서양의 거의 모든 업적의 토대가 되었는데,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그리스 철학의 중심 개념인 것처럼, 그리스 예술의 주요 주제는 인체 조각이었다. 그리스 철학이 사고의 명석함과 조화질서를 강조했듯, 그리스 미술과 건축 역시 균형을 강조하였다. 당시의 디자인은 색채보다 선과 형의 균형미에 중점을 두었으며 소재는 주로 식물이나 말 사자 같은 동물 나선형이나 기하학적 형태를 사용했다. 그들은 뛰어난 화가여서 벽화를 그렸고, 목재 패녈에도 그림을 그렸으며, 너무나 실물같아서 새들이 벽화 속의 과일을 쪼아먹으려 했다는 기록이 있다. 도기화에는 보통 그리스 신화 속의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가 전쟁이나 잔치와 같은 현세적인 주제가 주로 그려져 있다. 미술품속에 최초로 누드를 도입한 것은 그리스 인들이었다. 그들 사회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체력 증진으로 단련된 육체와 지적 토론으로 연마된 정신이 조화된 인물이었다. 그리스 건축가들은 흰대릭석의 "파르테논 신전" 을 통해 아테네의 위대함을 나타내고자 했다. 파르테논 신전의 완벽한 미는 직선에서 벗어나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약간의 곡선형을 띠고 있는데 기인한다. 건축을 거대한 조각품으로 간주했고 똑같이 조화와 이상적 비례의 규칙에 맞추어 건립했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제국이 건설로 그리스 미술은 몇 개의 작은 도시 국가를 벗어나 세계의 절반을 해당되는 지역의 조형언어로 발전했다. 이 후기의 미술은 그리스 미술이라고 하지 않고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동방의 나라에 건설한 제국의 이름을 따서 헬레니즘미술이라고 한다. 이 제국의 풍요한 수도들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라아의 안티오크, 그리고 소아시아의 페르가몬 등에서는 도리아 양식이나 이오니아식 건축의 우아함에서 벗어나 기원전 4세기 초에 고안된 코린트 양식이 유행했으며, 일반적으로 건물 전체에 더 많은 화려한 장식물을 입혔다. 그리스 미술의 양식과 창의성은 오리엔트 왕국들의 규모 및 전통과 융합되었다. 그리스 미술은 대부분 헬레니즘 시대에 변화를 겪게 되는데 헬레니즘 미술은 초기 그리스 조각의 조화미와 세련미 대신 거출고 격렬한 작품을 선호했으며, 보는 사람들에게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인상을 주기를 원했고, 또 확실히 보는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기원전 3세기경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섬에서 로마인과 그리스인의 교류가 시작되었는데, 처음에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에 압도당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미술뿐만 아니라, 시, 수사학, 철학 등에도 매료되어 많은 지식인들과 장인들(교사, 학자, 사상가, 조각가, 화가)을 고용하였다. 로마인들은 당시 유행했던 헬레니즘 취미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리스 조각들을 대량으로 복제하긴 했으나, 점차 자신들의 특징적인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로마 예술은 고전기 그리스 예술보다 지적이고 이상적인 면은 덜하였지만 현실적이고 기능적이었다. 로마의 건축가들은 아치와 궁륨, 돔을 개발한 것 이외에도 콘크리트를 최초로 사용했다. 이같은 혁신적인 건축기술로 인해 로마인들은 최초로 받침대 없이 거대한 내부 공간을 덮을 수 있게 되었다. 콜로세움이라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수용할 수 있으면서도 매우 효율적으로 설계되어 있어서 오늘날 스타디움의 디자인에도 응용되고 있다.
중세는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부터 르네상스 시대 까지(5세기~15세기) , 약 1000년 동안의 시기를 말한다.
기독교가 내세의 구원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지상의 물체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려는 경향은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다. 누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고, 심지어 옷을 입고 있는 육체도 해부학적인 정확성이 무시되곤 했다. 신학자들은 산지들이 물질의 아름다움을 통해 신성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믿었고, 그 결과로 매혹적인 모자이크와 회화, 조각품이 만들어졌다. 초기 기독교는 합법적이지 않은 종교여서 온갖 박해와 수모를 겪었으며 박해가 심할수록 그들은 로마의 지하묘소 카타콤에 숨어서 복음을 전파하고 벽과 천장에는 벽화를 남겼다. 국교로 승인후 고도의 기능을 갖춘 건축가에 의해 여러 곳에 거대한 성당이나 수도원이 세워지고 교회 벽면과 천장을 장식하기 위한 회화나 초기 벽면 모자이크가 전문가에 의해 만들어 졌다. 건축에서 신성에 대한 지향은 보다 밝고 가벼운 건물의 형태로 나타났다. 육중하고 거대한 로마 건축은 서서히 사라지고, 이상적인 기독교인 상이 건축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밖에서 보면 소박하지만 내부는 성령을 상징하는 모자이크, 프레스코, 스테인드 글라스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중세 미술의 황금기로 불려지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긴 기원후 330년경부터 이 도시가 투르크 족에 의해 멸망한 1453년까지 지속됐던 지중해 동부 지방의 예술이다. 로마가 야만족에의 의해 멸망하여 잿더미에 있을 당시 비잔티움은 초기 기독교 미술을 발전시켰으며 문명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비잔틴 미술과 건축의 복잡한 형식으로부터 오늘날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의미의 '비잔틴'이라는 단어가 유래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모자이크 작품 중 몇개가 5~6세기 터키의 비잔티움과 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 제작되었다. 모자이크는 국교로 공인된 기독교의 강령을 널리 유포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므로 그 주제는 대부분 종교와 관련이 있었고, 예수는 전지전능의 지배자나 설교자로 표현되었다. 당시 모자이크는 반짝이는 황금의 배경과 후광에 둘러싸인 성자들을 화려하고 장대하게 묘사한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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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はたけカカシ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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